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르망디 상륙작전 (문단 편집) === 연합군의 진격 === 그리고 상륙작전 시에는 고려하지 못한 노르망디 특유의 지형이 연합군의 발목을 단단히 잡았다. 당장 연합군은 시가지도 아닌 곳에서 시가전을 벌여야 했다. 보카주라고 불리는 1~4미터 정도의, 노르망디 농민들이 소유한 밭 사이의 경계로 삼기 위해 심어둔 키 작은 과일나무가 빽빽히 밀집한 벽으로 가득한 노르망디의 지형으로 인해 독일군이 이곳저곳에 아까 대활약한 티거 아홉 대는 물론 [[저격수]]나 [[대전차포]], [[야크트판터]] 등을 매복시켜 뒀다가 [[치고 빠지기|한두 발 쏘고 튀는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합군에게는 압도적인 항공 전력과 포병이 있었기 때문에 화력을 앞세워 독일군의 출혈을 강요했다. 또한 보카쥬도 미 육군 공병들이 처음에는 '''가방에 폭탄을 가득 넣어 뿌리째 날리는''' 방법을 쓰다가 위험하기도 하고 폭탄 낭비도 심해서, 한 '''병장'''의 아이디어를 적극 수용해 해안가에 버려진 [[체코 헷지호그]](노르망디 하면 떠오르는 철골로 이루어진 그것[* [[라이언 일병 구하기]] 회상 직후 맨 처음 나오는 것이다. 해변에 있으면서 상륙 초기 병사들이 엄폐물로 썼던 것.])를 날카롭게 잘라 전차 앞에 용접, 말 그대로 '''과일 나무를 수확'''하면서 돌파할 수 있었다. 덕분에 독일 전차들이 길로만 다닐 때 미군 전차들은 나무를 헤치며 자유롭게 움직였다. 6월 22일 미 육군 선발대가 셰르부르에 도착했고, 25일에는 치열한 시가전 끝에 셰르부르 수비대 사령부가 함락되고 사령관인 육군[[중장]] 카를-빌헬름 폰 쉴리펜(Karl-Wilhelm von Schlieben) 장군 (709보병사단 사단장. 첫날부터 격전을 벌여 사단이 와해수준의 피해를 입어서 남은 병력이 있는 셰르부르로 쫒겨온 후 수비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과 해군소장 발터 헤네케(Walter Hennecke) 제독이 항복, 30일에는 잔여 병력의 저항이 중지되어 셰르부르가 완전히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다만 항복 전에 헤네케 제독의 명령에 따라 해군 [[UDT|폭파반]]들이 항구를 박살내 놓아서 항구 복구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특히 해군 폭파반이 숨겨둔 [[부비트랩]]은 부설한 포로들을 직접 동원해 해체했음에도 끝내 발견 못한 것들이 수시로 폭발하며 연합군을 괴롭혔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쉘렌베르크와 헤네케.jpg|width=100%]]}}} || || 항복을 위해 미 육군 지휘소에 나타난 쉴리펜 장군[* 앞, 철모 착용자]과 헤네케 제독[* 바로 뒤, 정모 착용자][br][[높으신 분들]] 임에도 코트가 진흙에 절어 있는 것이 이들이 항복 직전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했는지 알려준다. || 6월 25일부터는 캉을 노리는 영국군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중간에 독일군이 히틀러의 재촉에 못 이겨 반격에 나서기도 했지만, 영국 [[육군]] 대신 해군의 함포 사격과 공군의 폭격을 신나게 맞고 후퇴해야 했다. 덤으로 방어 태세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러 [[베를린]]으로 날아간 롬멜과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의 잔소리만 듣고 왔고, 룬트슈테트는 서부방면군 사령관에서 해임당했다. 7월 11일, 히틀러 유겐트 사단을 중심으로 완강하게 버티던 독일군에 대해 영국 공군은 500여 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아예 캉을 들어엎는 대폭격을 감행해 먼지구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캉에는 70년 넘는 건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폭격의 피해가 심했으나, 여전히 영국군은 캉을 돌파하지 못했다. 한편, 셰르부르를 점령한 미군은 셰르부르 남부의 [[https://ko.wikipedia.org/wiki/생로|생로]]를 점령하기 위해 또다시 악전고투를 벌여야 했고, 7월 18일 결국 생로를 점령해 노르망디 지역을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점까지 연합군이 낸 사상자는 무려 12만 2,000명[* 이 사상자의 대부분은 6월 7일부터 7월 24일까지 발생한 것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의 [[생지옥]]이었던 [[오키나와 전투]] 3개월 동안 발생한 미군 사상자가 5만명이 넘는 것에 비해 1개월 반 동안 발생한 이 사상자 수치는 연합군 수뇌부에 경종을 울리기 충분했다.]에 달했다. 사실상 상륙시 별로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을 그동안의 전투에서 날려먹은 셈으로, 연합군의 주요 수뇌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